서울대학교 스키부를 소개합니다. (1. 태동과 탄생, 김현철 동문 20기)

"It seems I hardly had to steer, my course was planned And destiny guides us all and by its will, we rise and fall But only for a moment of time enough to catch our breath again"

광활한 설원위에서 시합중인 스키 선수의 마음을 담은 듯한 노래 'Ever since the world began' 의 일부입니다.

무엇이 서울대학교 스키부원들의 숨을 겨울의 대관령에서 50년 넘게 이어오게하고 있는지 동문들께서 서울대 스키부 50년사에 쓴 글과 사진을 통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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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첨부드리는 사진은 김명호 동문 (2기)께서 보내주신 사진입니다. 60년대 대관령의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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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동 - 한국에 스키가 도입되다

우리나라에 서양식 스키가 들어온 것은 구한말, 서양 선교사들이 국내에서 선교활동을 한 것과 때를 같이한다. 당시 그들이 겨울철 눈 덮인 산에서 스키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 후 1922년 일본인들이 원산에 스키클럽을 설립하였고, 1928년에는 원산스키클럽 주관으로 국내 최초의 스키대회가 개최되었다. 1929년에 역시 일본인들에 의해서 원산 근교 신풍리에 한국 최초의 스키장이 개설되었으며, 한국인 스키어가 탄생한 것은 1930년대 무렵이었다. 이즈음 소수의 한국인 스키어가 등장하기는 하였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스키는 접근하기 어려운 스포츠였고, 동시에 위험한 운동으로 인식되어 대중적으로 전파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스키의 맥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고,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으로 스키를 타는 환경이 더욱 열악해지면서 스키는 군사훈련용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1945년 해방 이후 1946년에 조선스키협회가 발족되었으며, 이듬해인 1947년에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제1회 전국스키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1948년에는 아차산에서, 1949년에는 울릉도에서 대회가 열렸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스키의 보급은 또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53년 강원도 대관령에 스키장이 건설되고, 같은 해 제34회 전국체전동계스키대회가 처음으로 개최되면서 이후부터는 대관령에서 본격적으로 스키대회가 진행되었다. 대한스키클럽은 1957년 국제스키연맹(FIS)에 가입하였는데, 국제스키연맹에 가입하게 되면서 한국의 스키는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한국 스키가 역사를 쌓아 가는 중에 서울대에서도 스키선수가 배출 되었다. 1950년 서울공대에 입학한 이들로 산악부 활동과 함께 겨울에는 스키를 타면서 서울대의 첫 스키선수가 된 것이었다. 이들은 전국학생스키선수권대회에도 참가하면서 순수 아마추어로서 성과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경제사정과 지속적인 선수 수급의 문제로 서울대의 스키 활동은 잠시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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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탄생 - 도전 정신과 열정으로 시작하다

정식으로 서울대 스키부가 창단된 것은 1962년의 일이다.

당시 스키어들은 등산복에 스키를 타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지금과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장비는 열악했을 뿐 아니라 스키를 탈 만한 슬로프도 손에 꼽혔다. 그래서 ‘스키어=산악인’이라는 공식은 스키가 순수 경기로 자리 잡힐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대 스키부의 시작도 산악회 활동의 일환으로 1958년부터 대관령을 드나들던 이들에 의한 것이었다. 더욱이 서울대 스키부가 창설을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했을 즈음인 1960년, 한국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스쿠아밸리Squaw Valley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에 최초로 참가하였다. 이는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한국 스키가 발돋움을 시작하면서 스키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하였고, 올림픽 참가는 당시 스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자극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렇게 한국 스키의 저변이 조금씩 확장되고 있을 즈음, 산악회 대관령 스키강습에 참가했던 김성수(1기) 부원이 홀로 스키대회에 출전하면서 서울대 스키부 창단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김성수 부원은 이후 각 단과대학에서 선수들을 모았고, 스키부가 창단하기 전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대관령으로 합숙을 가고, 스키대회에 참가하였다. 스키부 창단을 위한 활동은 대학동기인 조광호(1기) 부원과 함께 진행되었는데, 1962년 11월 11일 드디어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문리대 체육과 문영현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서울대 스키부가 창설되었다.

당시 대학 스키부는 1960년대에서 1970년 중반까지 단골 우승팀이었던 동국대, 학교 지원이 보장되어 있었던 경희대, 스키훈련을 쌓은 경력 자를 특기자로 받은 한양대 등이 막강한 팀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 대학은 스키를 잘 타거나 스키 경력이 있는 고등학생을 스카우트 하여 대학 내 스키부로 확충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대는 달랐다. 이미 스타급 선수들을 보유하고 계속 확충하는 다른 대학과는 달리 순수 아마추어 학생들로 구성된 서울대 스키부는 그 어느 대학 스키부보다 도전적이고, 의욕적이었다. 서울대 스키부가 가진 태생적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학 입학 이전에 배운 스키 실력이나 경험이 전혀 없었던 터라 서울대 스키부 신입생들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에 임해야 했고, 그 누구보다 고되게 훈련을 이겨내야 했다. 처음 신어보는 스키 부츠와 플레이트에 적응하기도 전에 활강부터 하라는 선배들의 불호령에 따르다보면 순식간에 슬로프를 뒹굴며 ‘안면제동’으로 눈밭에 박히기 십상이었다.

이렇듯 의욕적으로 창설된 서울대 스키부는 1963년 1월부터 첫 시합에 참가하였고, 그 해에 열린 제15회 전국학생스키대회와 제44회 전국 체전동계스키대회에 참가하는 등 시작부터 매우 의욕적이었다. 그리고 첫 출전한 제44회 전국체전동계스키대회 노르딕 대학부 40킬로미터 계주에서 3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더욱이 다음 해인 1964년 제45회 전국 체전동계스키대회 노르딕 40킬로미터 계주에서는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하였는데, 이는 1950년대부터 스키부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동국대를 제치고 얻은 수확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감격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 전까지 서울대 노르딕팀은 다른 팀들이 모두 골인하고도 한참 후에야 들어와 시합 임원들이 기다리다 추워서 죽을 지경이라는 불평을 듣던 때였기에 더욱 놀라왔다. 한편, 알파인 대회전과 신복합에서는 김성수 부원이 3위에 이름을 올렸다. 1965년에 치러진 제46회 전국동계스키 대회에서는 초대 주장이었던 조광호 부원이 대회전 3위, 신복합 1위의 성적을 올렸고, 김성수 부원 역시도 활강에서 3위에 입상하였다.

사실 그 당시에는 대학부 내에 노르딕팀이 많지 않아서 노르딕의 경우 서울대 스키부가 자주 메달을 딸 수 있었고, 특히 40킬로미터 계주는 서울대 스키부에게 ‘금메달의 보고’라고 여겨지는 종목이었다.

이처럼 서울대 스키부는 시작부터 열정이 넘쳤다. 비단 성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서울대 스키부는 창설 직후부터 강도 높은 훈련과 적극적인 시합 참가로 아마추어 스키부답지 않은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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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2012년 조선일보에 실린 대한민국 초기 스키 대회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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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 since the wolrd began 의 전체 가사입니다.

"We're the keeper of the fl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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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36기 공창배 선수가 스키부 네이버 카페에 정리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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