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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seems I hardly had to steer, my course was planned
And destiny guides us all and by its will, we rise and fall
But only for a moment of time enough to catch our breath again"
광활한 설원위에서 시합중인 스키 선수의 마음을 담은 듯한 노래 'Ever since the world began' 의 일부입니다.
무엇이 서울대학교 스키부원들의 숨을 겨울의 대관령에서 50년 넘게 이어오게하고 있는지 동문들께서 서울대 스키부 50년사에 쓴 글과 사진을 통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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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첨부드리는 사진은 김성수 동문 (1기)께서 보내주신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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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키부를 창단하게 된 동기
의예과에 입학한 것이 1959년 봄이었다. 원래 고등학교 때 산악부에 있었기 때문에 곧장 문리대 산악회에 새 멤버로 자원 입단했다. 1960년 초 문리대 산악회 대관령 스키 강습에 참가했던 것이 그 후에 일어난 스키에 관련된 모든 일의 시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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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0시즌, 문리대 산악회 스키 강습 당시 횡계리에서. 검은 옷을 입고 목에 스키 바인딩 와이어를 건 사람이 그해 서울대팀으로 유일하게 출전한 이병주 선수이다(오른쪽에서 4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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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0시즌, 횡계리 남쪽의 이름 없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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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0 시즌, 스키를 타기 위해 매일같이 횡계리 주변으로 눈을 찾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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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0시즌, 점심을 먹은 뒤 스키에 왁스를 바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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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0시즌,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점심시간. 스키를 벗어서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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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0시즌, 조그만 언덕에서 연습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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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0시즌, 시즌이 끝났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하숙집 앞에서 떠날 채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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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0시즌, 횡계천 동쪽에 있던 길가의 하숙집 앞에서. 모두 군용스키를 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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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0시즌, 처음으로 하는 활강. 횡계리 남쪽의 이름없는 언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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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0시즌, 강습하는 모습. 강습교수는 문리대 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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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0시즌, 이병주 강사의 모습. 개인적으로 서울대 대표로 출전. 아마 서울대 스키선수로서는 처음일 것이다. 문리대 산악회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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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0시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대산에 들린다. 버스를 기다리며
1961년 겨울 의예과 2학년 때, 문리대 산악회에서 졸업해 버린 선배가 떠나자 대관령 여행은 무산되었고, 나는 고교 동문친구 몇 명과 같이 떠났다. 그때쯤에는 스키에 꽤 익숙하게 된 때였고, 마침 전국스키대회가 열렸을 때 서울대에서는 아무도 출전하는 사람이 없게 되자 나는 처음으로 혼자 나가기로 했다. 등수에는 들지 못했지만, 경기 후 어느 정도의 자신을 얻었다.
한겨울에 두 번의 스키대회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한국학생스키연맹 주최의 학생스키대회가 있었고, 조금 늦게 대한체육회 주최의 전국체육대회 동계스키대회가 열렸다. 이러는 중에 나와 같은 학년의 조광호 동문이 그의 등산 친구들과 같이 오자, 우리 두 의예과 선수가 서울대 대표로 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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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1시즌, 제3스키장에서 스키대회에 출전. 당시 나는 제3스키장 입구의 초가집에서 하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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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1시즌, 처음으로 하는 Giant Slalom. 제3스키장에서. 등수에는 못 들었지만, 의외로 성적이 좋았었기에 더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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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1시즌, 제3스키장 꼭대기 출발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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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1시즌, 제3slope 건너편에서 본 제3 스키장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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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1시즌, 독사진 겸 기념사진. SAK 는 아마 한국스키협회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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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1시즌, 앉어서 쉬기. 제3 슬로프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강능 국도. 사람들이 횡계리에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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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1시즌, 제3스키장 입구의 하숙집안에서. 같이 갔었던 고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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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1시즌, 제3스키장에서의 경기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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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문리대에서 한 사람이 서울대학교를 대표해서 전국 스키대회에 출전했었고, 그 사람이 졸업하자 서울대팀의 전통이 당장 끊어지게 되었는데, 스키에 재미를 붙인 본인이 1961년 초 처음으로 그 자리를 혼자 채워서 출전했다. 그때는 대개 각 단과대학별로, 또는 각자 그룹으로 대관령에 와서 스키를 타고 갔는데, 본인이 출전한 후로 전 단과대학을 통합해서 한 팀으로 단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몇 개 단과대학에서 하나 하나 선수들을 끌어들여 모으면서 스키대회에 공동 출전했다. 당시 가장 큰 과제가 단과대학 각 개인들의 단결과 후배 양성으로 계속해서 스키부의 전통을 유지하는 것에 있었기에, 하나의 범 서울대 스키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후, 본과 1학년때인 61-62시즌 좀 더 본격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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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시즌, 오수도리 산장에서 내려다 본 제 3스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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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시즌, 제3스키장에서의 Giant Slal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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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시즌, 우리반의 김대언, 권평일이 왼쪽, 2년 선배였던 이종욱이 놀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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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시즌, 이종욱 선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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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시즌, 그 당시에는 제3 slope 바로 밑에 초가집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은 서당으로도 쓰였고, 머리 딴 어린 학생들이 있었다. 이 집 담에 기대어 점심 먹고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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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시즌, 설악산 등반대원이 횡계리에 들렸고, 여기에서 설악산으로 같이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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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시즌, 제3스키장에서 스키대회에 출전. 아마 체육회, 스키협회 주관 경기였다. 이 사진은 신문에 나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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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시즌, 조광호 선수 Starting gate에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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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시즌, 본인 (왼쪽)과 조광호. 1962년에 서울대 팀 두명. 조광호는 부고 동기들과 같이 왔다가 나와 같이 서울대로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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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시즌, Giant Slalom 서울대팀 시합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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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시즌, 김성수 선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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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시즌, 경기후의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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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시즌, 이해 겨울 처음으로 미 8군이 제공한 Rope Tow가 등장한다. 아마 2월 말이였다. 이것을 이용해서, 미군들이 오고, 또 National Medical Center의 Scandinavian doctors and nurse들이 왔다. 편리하기는 했지만, 걸어 올라가기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별로였고 걸어 올라가 한치 한치 아껴서 내려오던 우리 스타일에 잘 맞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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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62년 서울대학교 스키부 창단
1962년 가을에 문리대 문영현 체육교수를 통해서 처음으로 새 스키부의 창설을 의뢰했고 서울대 본부로부터 인정이 되면서, 문영현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서울대팀이 정식으로 탄생했다. 이것이 ‘SNU Varsity Ski Team’의 시작이 된다. 각 단과대학에서 따로 오던 대관령 합숙을 의대중심으로 하나로 단합하게 되었다. 그때 대학본부로부터 조그만 경제지원을 받게 되었고, 서울대 스키부의 유니폼을 만들었다. 또 같은 해 가을에 의대 학생회 선거에서 새 학생회장단이 선출되었는데 다행히도 잘 아는 고교 선배들이여서, 그 당시 여름철에 활동이 많았던 의대 산악부를 정식으로 등록하고 학생회의 경제적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1962년 당시 한국의 스키계는 일제강점기의 잔해였던 원시적인 시대로, 불과 겨우 몇 년 전에 처음으로 동국대 출신 한 사람이 올림픽에 출전(출전이라기보다는 참가)했을 때 였다. 일반인들은 일본 점령하의 ‘야마스키(나무 스키로 에지edge가 없는 스키)’를 주로 타던 시대였고, 미국 군수물자로 들어온 스키장비가 처음 들어와 이것을 쓰던 시기였다. 서너 명의 부유한 사람들이 일제 현대 스키를 구입해서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당시 모든 스키 장비와 시설은 아주 원시적이었다. 평창군 횡계리의 초가집에 하숙을 정하고, 밤을 새우면서 손으로 단단한 히코리hickory 나무에 구멍을 뚫어 ‘바인딩binding’ 을 붙였다. 다음날 아침 일단 약 10명이 남쪽으로 10리쯤 걸어가서 지금의 용평 부근의 눈 덮인 조그만 슬로프slope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좋은 눈을 찾아서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스키를 연습했다. 보통 겨울 길을 무거운 스키를 메고 다녔다. 물론 그때는 정식 스키장이나 스키 시설은 전혀 없었고, 그냥 야산의 눈 덮인 슬로프를 쓰는 것이었다.
그해 대한체육회 산하의 대한스키협회 주최로 스키대회가 ‘새봉(횡계리 동북쪽의 산)’에서 열렸는데, 그때 서울대는 한 사람이 출전했었다. 그때 스키협회 임원들은 사실상 대한산악회 임원들과 거의 겹치는 상태였다. 즉 등산하는 사람들이 바로 스키 타는 사람들이었다. 선수들은 강릉고등학교를 비롯해, 대학교로서는 경희대, 동국대의 스키부가 있었고, 서울대는 문리대의 단 한 사람이었고, 일반 팀으로는 육군스키부대와 해병대스키부대가 있었다.
그때 대관령에서 오래 머물렀던 (잠깐 지나가는 사람들을 빼고는) 스키 인구는 아마 50명 남짓했을 걸로 기억하며, 대개 같은 슬로프를 쓰기에 우리는 서로 다 형제처럼 친한 사이였다. 그때는 정해진 스키장이 없었기 때문에 눈이 좋은 산비탈이면 아무 곳에서나 스키대회를 열었다. 가장 흔히 쓰던 곳이 횡계리에서 빤히 동남쪽으로 보이는 ‘지르메 슬로프’ 아니면 횡계리 서쪽의 ‘제3슬로프’였고, 눈 사정이 나쁠 때는 새봉 정상까지 올라가서 새봉 정상 북면에서 하곤 했다. 어떤 해는 진부리 북쪽까지 군용차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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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처음으로 서울대 팀이 단과대학들을 통합해서 여러 선수가 경기에 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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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아마 제3스키장 같다. KAAA는 아마 한국체육회를 의미하지 않을지? 그러나 이 경기는 학생연맹 경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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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제3스키장에서의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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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Downhill race처럼 보인다. 제3스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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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횡계리 앞의 들판에서 Nordic 경기. 이해에 처음으로 공대산악회로 구성된 Nordic 40Kilometer Relay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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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첫해의 Nordic결과는 아주 부진했다. Goal line에서 기다리고 있는 서울대팀
1963년 겨울에 들어서자 한 사람으로 시작된 스키팀이 장족의 발전을 이루고 우리의 스키대회 활동도 커지기 시작했다. 그해 처음으로 노르딕 경기에서 서울대팀은 동국대를 물리치게 되어 꼴찌의 누명을 처음으로 벗게 되고, 알파인 경기에서도 처음으로 등수안에 들게 된다. 영하 30도의 추위에서 10~20킬로미터를 뛰던 의대 노장들의 힘이 소진되자, 그해 겨울에 대관령을 방문한 공대 산악부원들을 흡수해서 크로스컨트리팀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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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제3스키장 오수도리 산장 밑에서의 전국체육대회 스키대회 같다. 스키대회는 점점 규모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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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서울대 팀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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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중간의 서울대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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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서울공대팀의 분전. 제3스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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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하숙집 앞에서. 박용현, 김성수, 김명호, 김우기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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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횡계 개천가의 김진철씨 하숙방 안에서의 모습. Burner에 국을 끓이고, 밥은 하숙집 주인이 부엌에서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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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박용현 (왼쪽), 조광호 (오른쪽) 동문, 다른 단과대학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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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경기가 끝난후 국립의료원의 Scandinavian사람들과 같이 스키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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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서울미대 졸업반 여학생 네 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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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하숙집 앞에서 문영현 교수, 그의 딸, 미술대 졸업반 여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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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눈보라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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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눈보라 속에서. 제3스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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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시즌, 제3스키장에서 집으로 돌아 오는 우리들. 맨 왼쪽 김우기 동문, 두번째가 박용현 동문
1964년 겨울에는 처음으로 서울대 스키부의 교내 스키대회가 횡계리 제3스키장에서 열렸는데, 서울대가 교내 스키 대회를 가지는 유일한 대학교가 되었다.
스키코치도 없이 독학으로 배우는 우리로서, 스키경기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극소수의 선수로만 된 다른 대학보다는, 우리는 선수, 비선수들을 인도해서 명실공히 대학 스키부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대학본부에서도 경제적 보조가 나와서, 우선 스키부 유니폼을 마련했다. 우리가 design해서 약 열 몇개정도 주문했다. 필요했던 스키 장비는 꿈도 꾸지 못했지만 서울대 스키부의 발전이 애초 계획한대로 잘 진전되고 있었다.
나와 광호는 이제 2년밖에는 남지 않었던 상황이라 더 열심히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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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그 해 처음으로 횡계리 뒷산에 지어진 대관령 산장 앞에서 처음으로 학생스키연맹대회가 시작된다. 그때 본인은 학생스키연맹 대의원으로 초청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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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서울대 스키팀 들의 사진. 입장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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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태극기 밑 왼쪽에 서울대학교 교기가 보인다. 대관령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전에는 서울대의대기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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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서울대 스키팀. 왼쪽 다섯번째 해병대 팀 단장 (대우), 그 외에 다른 gu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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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제3스키장에서의 시상식. 이 해에 처음으로 Nordic에서 서울대가 동국대를 꺽고 2위를 차지. 본인이 마지막으로 뛴 Nordic에서였다. Alpine종목에서도 몇 군데에서 입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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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제1회 서울대학교 교내 스키대회. 제3스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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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교내스키대회 시상식. 문영현교수의 뒷모습. 모두 형제같이 지나는 터라 화기애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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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대관령 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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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국도 옆 경찰서 바로 서쪽에 있었던 횡계하숙옥 앞에서 서울대 스키부 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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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서울대팀의 프리 스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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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육군부대 대원들과 김성수, 조광호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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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서울대 스키부 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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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회전 기문 연습중인 김성수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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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시즌, 김성수 동문의 독사진
1965년 겨울은 나와 조광호에게는 마지막 대관령 여행이었다. 이 해에 공대 학생으로 구성된 크로스컨트리팀이 노르딕 계주 한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는 영광을 누렸다. 서울대는 드디어 스키대회에서도 무시못할 대학팀이 되었고, 알파인 종목에서도 몇 명이 등수에 들었다.
한 2-3년만 더 있으면 스키부를 확고부동하게 만들 수 있었겠지만 시간의 흐름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그때의 희망은 OB로서 계속 후배들을 훈련시키고 양성하는 것이였다. 단지 우리는 어떤 운명이 닥쳐오고 있는지 전혀 몰랐을 뿐이다.
제2회 교내스키대회를 열었고 경기에서도 Nordic에서 금메달, Alpine에서도 금메달은 획득하지 못했지만 2위까지 진출했다. 드디어 서울대 스키팀은 다른 대학교로부터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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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5 시즌, 장소가 어디인지 기억에 없으나 제2회 교내스키대회를 열었다. 뒤돌아보는 문영현 교수, 그 옆 사람이 누군지 기억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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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5 시즌, 교내대회 Nordic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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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5 시즌, 교내대회 선수들. 오른쪽 끝에 서울대 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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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5 시즌, 경기후의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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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5 시즌, 대관령 산장에서의 학생스키대회 입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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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5 시즌, 나의 마지막 Cross country 경기. 여기에서 동국대팀을 제치고 2등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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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5 시즌, Slalom 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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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5 시즌, 서울대 스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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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5 시즌, 진부리에서 북쪽으로 한참 들어가면 나오는 새 스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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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5 시즌, 조광호, 선배님이신 오형, 김성수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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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5 시즌,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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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5 시즌, 아마 전국체육대회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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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5 시즌, 진부리 북쪽의 Slope에서의 마지막 Giant Slalom race. 여기에서 내 입술이 Pole에 부딛혀 터진다. 2월 마지막 날로, 다음날 서울로 돌아가서 그 다음날의 졸업식에 간,본인이 마지막으로 뛴 강원도의 Slope이다. 다시 돌아오기를 기약했지만, 졸업 후 도미와 함께 영영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후배들에게 떠맏기고 조국을 떠나야 했던 나와 조광호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였지만, 지금도 미안함을 금치 못한다. 다행히도 훌륭한 후배들이 있었음에 감사할 뿐이다.
졸업 후 스키부 OB로서 더 활발한 스키팀을 구성하는 것이 우리의 큰 꿈이었으나, 그해 나와 조광호는 국방부의 ‘킴스플랜Kim’s Plan’에 따라 얼떨결에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바쁘고 어려웠던 미국에서의 ‘Medical Training’과 전문의 자격 획득에, 운명의 장난이라 할까, 수년간 대관령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1970년대에 처음 고국에 돌아왔을 때에는 옛날의 횡계리는 자취도 남지 않았고, 알고 지내던 스키부 멤버들도 찾기 어렵게 헤어진 후였다.
3. 스키부를 통해 배운 인생의 교훈
어떠한 난경도 끈질긴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고, 그 난경 속에서도 인생은 그런대로 아름답고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믿게 되었다. 단지 이런 신념은 나만이 아니고 모든 6.25 전 세대의 한국인들이 배웠던 것으로, 우리 세대에게는 하나의 당연한 생활철학이었다. 그런 신념이 미국에서의 이민 생활 개척에도 도움이 되었다. 하나의 불패의 정신력이라 할까?
4. 서울대학교 스키부가 나아갈 길, 추구해야 할 가치
옛날 나의 시절처럼 난경의 극복은 이제는 별 의미가 없겠지만, 대관령에서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만나서 같이 지내며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하나의 공동체로 생활하면서 이루는 우정과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아끼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사실 경기에서의 우승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스키부 또는 스키팀이라는 큰 우산 아래서의 선배와 후배의 관계를 졸업 후에도 유지하고, 후배 양성에 힘쓰면서 전통이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사회생활에서 하나의 특별한 인연으로 엮인 친밀한 공동체의 멤버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중한 것인가. 이 특정 그룹은 아무나 가입할 수 없는, 또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그런 드물고 소중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멀리 조국을 멀리 떠나 타향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인간관계다.
5.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
바쁜 학창시절에서 스키부나 스키팀의 한 사람으로서 지낸다는 것은 먼 훗날에 잊을 수 없는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경기에서의 우승도 좋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정과 인간관계의 형성이다. 그것을 이루기에 최선을 다하며 학창 시절의 과외생활을 맘껏 즐기기를 바란다. 이러한 시간이 인생에서 한번 지나가면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기회라는 것을, 그것이 지나가 버리기 전에 알기를 바란다.
서울대 스키부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선배되는 사람들의 따뜻한 인간성과 후배를 아끼면서 끌어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새는 어떨지 잘 모르겠으나, 우리 시대에 특징이었던 고리타분한 권위주의를 버리고 형제, 자매의 우정관계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승리라는 결과보다는 같이 노력하며 즐긴다는 의식이 더 중요하다. 현역 멤버들이 멀리 앞을 바라보면서 후배 양성에 적극적으로 힘쓰도록 해야 한다.
인생의 모든 과제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조용히 은퇴해서 사는 지금에 돌아보건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귀도 아니고 영화도 아님을 느낀다. 사실, 돈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없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오랜 세월과 성숙한 나이가 가져다주는 지혜의 하나다. 정말 소중한 것은 젊은 시절에 깊이 맘속에 새겨진 추억들이다. 학창 시절에 일어났던 대관령에서의 스키부 생활은 그중의 가장 중요한 하나가 된다. 그때 거기에서 그런 일들이 없었다면, 그런 추억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무한한 특권임을 다시 인식한다.
더구나 오늘날, 한 번도 만나보지도 못한 후배들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서울대 스키팀의 50주년 기념을 맞이하니, 나로서는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다. 그동안 꾸준히 전통을 지켜준 후배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으며 고마움과 그들의 대견함에 나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불행히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난 조광호 동문과 함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
“후배님들,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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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서울대 스키부 50주년 기념식에서 감명깊은 연설을 해주고 계신 김성수 동문 (1기)
결국은 참았던 감동의 눈물을 흘리셨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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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서울대 스키부 50주년 기념식에서, 박인철 동문 (8기)과 김성수 동문 (1기)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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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서울대 스키부 50주년 기념식에서, 임정기 동문 (10기)과 김성수 동문 (1기)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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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서울대 스키부 50주년 기념식에서, 50주년 기념식 준비위원장님이셨던 권오중 동문 (15기)과 김재형 (21기), 강대희 (23기) 동문 그리고 김성수 동문 (1기)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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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서울대 스키부 50주년 기념식에서, 서울대 스키부 50년사 편집위원장님이셨던 김현철 동문 (20기) 과 김성수 동문 (1기)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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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서울대 스키부 50주년 기념식에서, 서울대 스키부 지도교수님이신 방문석 동문 (22기)과 김성수 동문 (1기) 내외
* 본 게시물은 36기 공창배 선수가 스키부 네이버 카페에 정리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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