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스키부를 소개합니다. (3. 성장, 김현철 동문 20기)

"It seems I hardly had to steer, my course was planned And destiny guides us all and by its will, we rise and fall But only for a moment of time enough to catch our breath again"

광활한 설원위에서 시합중인 스키 선수의 마음을 담은 듯한 노래 'Ever since the world began' 의 일부입니다.

무엇이 서울대학교 스키부원들의 숨을 겨울의 대관령에서 50년 넘게 이어오게하고 있는지 동문들께서 서울대 스키부 50년사에 쓴 글과 사진을 통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3. 성장 - 합숙 제도의 정착 및 훈련의 체계화

1960년대 말에는 합숙 인원도 많아지고, 합숙과 훈련에서 보다 조직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실장’이라는 직책이 새로 생겨 부원들의 영양과 위생을 책임지게 되었고, ‘알파인부장’과 ‘노르딕부장’도 임명되어 보다 책임감 있는, 체계적인 훈련을 추구하게 되었다.

서울대 스키부의 꽃: 동계 합숙

동계 합숙은 스키부 활동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부원들에게 깊게 각인된 스키부 활동이다. 실제로 합숙을 통해 스키 기술은 물론 스키부의 정신을 체득하게 된다. 공동체 생활을 통해 고교시절까지 익히지 못했던 협동심과 타인을 배려하는 능력을 배우게 되고, 단체 활동을 통하여 우정과 소통의 방식을 배우기도 한다. 그래서 서울대 스키부원들의 기억 속에 합숙은 ‘스키부의 꽃’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합숙생활은 혹독한 훈련과 엄격한 단체생활,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 대관령의 강추위를 뚫고 새벽 공기를 마시며 시작되는 아침운동이 끝나면 실전 훈련으로 들어간다. 아침식사를 하고 김밥을 말아서 배낭에 넣고 스키 장비를 바리바리 싸들고는 스키장으로 향한다. 서울대 스키부는 항상 다른 팀보다 먼저 슬로프에 올라 가장 늦게 내려오는 것이 언제부턴가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70-71 시즌, 박인철(8기), 김광현(8기), 양문규(9기), 조수헌(9기), 이강우(10기), 임정기(10기), 조상헌(11기), 정민영(11기), 윤여규(11기), 백현이 부원 등이 함께 제3슬로프 오수도리산장 앞에서

70-71시즌, 제3슬로프에서

당시 스키 장비란 지금의 것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열악한 상황이었다. 한 번 넘어지면 부츠와 플레이트는 각각 제 갈 길을 찾아 눈밭에서 뒹군다. 게다가 리프트는 서울대 스키부가 창설된 이후 강산도 변한다는 10년도 더 넘은 1975년에 용평스키장이 개장하면서 처음으로 생겼으니, 슬로프를 훌쩍 내려와 다시 오를 때까지의 고충은 참으로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낮의 훈련이 끝나고, 달콤한 저녁식사까지 마친 후에는 스키잡지와 교본들을 놓고 연구가 시작되었다. 몸으로 부딪히는 훈련이 아니라 머리로 익히는 학습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일사불란한 팀워크와 단체 생활을 위해 합숙은 엄격한 규율로 진행 되었고, 분명한 위계질서로 기합도 빠지지 않았다. 합숙기간 중에는 흡연이 엄격하게 금지되었으나, 때로는 부원들 간의 게임과 음주가무로 대관령의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는데, 밤늦도록 술을 마시다 술이 떨어 지면 멀리 떨어진 양조장의 문을 두드리는 일도 있었고, 간혹 정신이 해이해지거나 나태한 모습이 보일 때에는 뒷마당에 모여 단체로 ‘빠따’를 맞기도 했다. 그리고 몇몇 스키부원들의 기억 속에 강렬히 각인되어 있는 ‘스트리킹streaking’이 있다. 스트리킹은 팬티만 입은 채 신발도 안 신고 알몸으로 달리는 일종의 극기 훈련으로, 스트리킹의 경우 주로 OB 선배들의 명령으로 불시에 이루어지는데, 대관령 영하 20도 이하의 추위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후유증(주로 발에 생긴 동상)이 너무 커서 1976년 이후로는 내부적으로 금지되었다.

합숙생활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빠킹’ 제도인데, 이는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공동의 이익을 침해한 부원에게 주어지는 벌금제도로서 방안에서 방귀를 끼는 경우(‘유성무취’보다는 ‘무성유취’가 더 벌금이 크다), 물이나 음식을 엎지르는 경우, 음식을 남기는 경우, 심지어 여자 친구로부터 편지가 오는 경우에도 어김없이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이처럼 합숙소에서의 단체생활은 협동심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인내를 배우는 장이었지만, 동시에 ‘재미’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스키부의 나이트 라이프를 즐겁게 해주었던 부원들의 계보가 지금도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데, 성악을 정식으로 사사받고 ‘테너 가수’로 활동했던 김광현(8기), 기타 솜씨가 보통 이상이어서 일명 ‘양피리’로 불렸던 양문규(9기), 정확한 리더를 알 수 없는 ‘우가자가 밴드’, ‘별이여 사랑이여’를 히트시킨 ‘횡계코러스’, 김수일의 ‘아파트’가 유일한 레파토리였던 ‘김재형(21기) 밴드’, 화려한 말발과 쪽팔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연기로 ‘밤의 황제’로 군림했던 채희동(26기) 부원 등이 바로 그들이다.

때로는 겨울에 눈(적설량)이 부족한 사태가 발생하여 스키부에 비상이 걸릴 때도 있었다. 1970년 겨울합숙의 경우 눈이 부족하여 목야지, 내차항 등으로 눈을 찾아 헤매기도 하였고, 가끔은 고온으로 눈이 녹아 스키부원들은 예정에 없었던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1973년 겨울합숙 때에도 눈이 부족한 사태가 일어났다. 약 보름가량 눈을 기다리며 방에서 스키(속칭 ‘방키’)를 타야 했다. 방키에 지친 부원들은 결국 2시간을 걸어서 눈을 찾았지만, 숙소까지 왔다 갔다 하는데만 4시간이 걸렸고, 2시간 스키를 타고 나면 철수해야 했다.

반면 폭설로 인해 훈련이 어려운 때도 있었다. 대관령의 폭설은 함박 눈의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동계합숙을 2~3년 정도 해보면 체득하게 되는 사실이지만, 동풍이 건듯 불면서 싸라기눈이 내리면 종종 폭설의 징조로 해석되곤 한다. 1969년에도 동풍이 불며 내리기 시작한 눈이 꼬박 사흘을 쉬지 않고 내렸다. 도로와 지붕이 같은 높이가 되었을 정도였다. 당시 설악산에서 동계연합등반 중이던 서울대 산악부원이 눈사태로 여러명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할 정도였고, 대관령의 횡계 마을은 2주 동안 교통이 두절되어 고립되는 바람에 한국일보 주최로 대관령산장에 묵으면서 스키 강습을 받던 젊은이들이 한국일보사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서울로 후송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합숙이 서울대 스키부의 전부였다면, 지상훈련은 합숙을 위한 워밍업이었다. 지상훈련은 체력단련을 위한 기초훈련으로 서울의대를 중심으로 근방 도로를 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삼선교 고갯길, 성북동과 삼청터널 사잇길, 성균관대학과 비원 사잇길 등을 스키부 부원들은 뛰고 또 뛰었다. 달리기가 끝나면 계단 오르내리기, 기문 통과하기, 토끼뜀 뛰기, 오리걸음 걷기, 턱걸이 등 강도높은 훈련이 이어졌고 신입부원들은 버스를 오르내리기 힘들 정도로 녹초가 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서울대 스키부의 정신: 기권은 없다

스키부원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시합이다. 창설 직후 스키부원들은 전국체전 동계스키대회는 물론 전국학생스키대회, 전국신인스키대회, 바이애슬론대회 등 수많은 스키대회에 적극적으로 출전하였다. 때로는 좋은 성적을 내기도 하고, 때로는 출전에 의미를 두는 경우도 있었지만 서울대 스키부는 성적에 연연하지만은 않았다.

서울대 스키부는 대부분이 순수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되다보니 부원들은 다른 대학선수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시합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시합의 목표는 성적보다는 ‘최선’이었고, ‘완주’였다. 이런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서울대 스키부를 설명하는 주요한 단어가 되었다. “서울대 스키부 사전에 기권은 없다”는 말은 그저 구호가 아니라 명백한 실천이었다. 1968년 제49회 전국체전 동계스키대회에서 김광현(8기) 부원은 노르딕 30킬로미터에서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김광현 부원의 경우 대학에 와서 처음 스키를 배웠고, 스키를 탄지 단 2년 만에 뛴 시합이었지만, ‘기권은 없다’는 생각으로 완주한 결과였다. 게다가 그 당시 대학부 5명이 출전한 노르딕 30킬로미터에서 2명이 기권을 했으니, 서울대 스키부의 완주를 향한 정신이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오세문(10기) 부원은 경기 도중 스키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완주를 하기도 하였다. 채희동(26기) 부원은 신입생 때 처음 출전 한 시합에서 부러진 스키코에 반창고를 말아 붙이고 그 위에 왁스를 바른 채 열정과 투지로 시합에 임하였다. 하지만 형편없는 장비로 인해 스키는 매우 불안정했고, 더욱이 처녀 출전이니만큼 실력도 부족하여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피투성이가 된 채 경기를 완주하였다. 정상일(28기) 부원 역시 노르딕 30킬로미터 처녀 출전 경기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하면서 완주를 목표로 내달렸고, 어느덧 속도가 붙어 한 명씩 추월하면서 결국에는 5위로 골인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완주는 서울대 스키부원 모두에게 적용되는 원칙이었고, 부상을 당하거나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이기고 완주를 하고 나면 선배들과 동료들의 따뜻한 격려를 받을 수 있었다.

서울대 스키부의 도전하고 인내하는 정신은 서울대 스키부가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고, 외부에서도 인정받는 이유가 되었다. 결국 예상을 뒤엎고 좋은 성적을 내는 결과를 가져오곤 하였는데, 1981년 제62회 전국체전 동계스키대회 노르딕 40킬로미터 계주에서 윤창선(20기), 김재형(21기), 이상익(21기), 김현철(20기) 부원이 전문선수로 구성된 관동대학을 제치고 3위에 입상한 것이 그 좋은 예라 할 것이다.

81-82시즌, 70년대 중후반부터 OB부원들의 일반부 시합 참가 및 메달 획득이 늘어났다. 1982년 전국체전 당시 일반부 15km 2위, 30km 1위를 차지한 윤창선(20기) 부원의 출발 모습

81-82시즌, 여기에 있는 부원 중 김현철(20기), 윤창선(20기), 김재형(21기), 이상익(21기) 부원이 80-81 시즌 관동대를 꺾고 제62회 전국체전 동메달을 딴 주역들

1981년 매일경제 기사입니다.1981년 제62회 전국체전 동계스키대회 노르딕 40킬로미터 계주에서 윤창선(20기), 김...cafe.naver.com

1991년 제5회 장비전시회때 전시되었던 서울대 스키부의 메달과 상장들


* 본 게시물은 36기 공창배 선수가 스키부 네이버 카페에 정리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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